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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충녕과 양녕

by 인물소개해드리요 2020.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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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녕과 양녕태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는 셋째아들 충년대군이니, 곧 조선조의 4대 임금인 세종이다. 세종대왕의 휘는 도요, 자는 원정이다. 태조 4(1397) 410, 원경왕후의 몸에서 태어나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되자 세자로 책봉되었다.

충녕이 네 살 무렵, 원경왕후는 태종이 충녕을 품에 안고 둥그런 해바퀴 속에 앉아 있느 꿈을 꾸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태종이 보위에 오르니 부자가 모두 대통을 이으리라는 길몽이었다.

충녕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천성이 총명하여 손에서 책을 놓는 법이 없었다. 늘 과묵한 모습으로 입과 발놀림을 가벼이 하지 않고, 그 자태에 아름다운 위의가 서리어 있었다. 비록 충녕에게 두 형이 있었으나 충녕의 대범함과 총명함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이러한 충녕의 비범함을 가장 먼저 눈치챈 인물은 맏형인 양녕대군이었다.

양녕대군은 태종4(14040, 10세 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아우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스스로 방행을 일삼았다.

그는 글공부에 뜻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공부방 앞뜰에 새덫을 놓아 새를 잡고, 매 소리를 흉내내어 사람들을 놀라키기도 했다. 또한 부왕이 평강으로 사냥을 나가는데도 병을 핑계대고 배웅도 하지 않다가 몰래 시골로 내려가 따로 사냥을 즐기기도 했다.

양녕대군의 방행은 더욱 심해졌다. 그는 기생과 노느라 임금이 베푸는 연회에 나오지도 않았다. 초파일에는 담을 넘어 기생들과 어울리고, 잡인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잡스러운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중추부사 곽정의 첩 어리를 납치하여 희롱한 일도 있었다.

양녕대군의 행실이 이러하니 태종은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태종은 양녕대군을 꿇어앉히고 엄하게 꾸짖었다.

 

 

조정 대신들까지 너의 행실을 탓하니 어찌 된 일이냐? 나라에는 국법이 있고, 백성에게도 법도가 있는법, 하물며 세자인 네가 어찌 그리 세상 물정을 모른단 말이냐? 너는 충녕의 행실을 보지도 못하였더냐!”

태종은 양녕대군을 호되게 꾸짖었으나 그의 방행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그러자 태종은 점점 맏아들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양녕은 본래 자유분방한 성품을 지녔기 때문에 엄격한 궁중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양녕이 왕세자로서의 품위를 잃자 태종의 마음은 점점 충녕대군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양녕대군은 태종의 뜻이 충녕대군에게 있음을 깨닫고 일부러 미친 체를 하였다

 

 

둘째 아들인 효녕대군 또한 부왕의 마음이 변한 것을 알고 열심히 글 공부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양녕대군이 효녕대군의 공부방으로 찾아왔다.

양녕대군은 효녕대군의 책상을 발로 차며 비꼬는 투로 입을 열었다.

한심하구나. 충녕에게 성인의 덕이 있음을 네가 아직 모르더란 말이냐?”

그 말을 들은 효녕대군도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스스로 머리를 깎고 절간으로 향했다. 홀로 절에 들어가 온종일 북을 두드리니 북 가죽이 흐물흐물해질 정도였다. 그후 효녕대군은 심산유곡의 산사를 방랑하며 세상사를 잊었다 한다.

양녕의 행실이 더욱 해괴해지자 조정에서는 양녕을 세자에서 폐해야 한다는 주청이 끊이지 않았다.

전하, 세자를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소서. 충녕대군은 성품이 온후하고 덕과 학문이 깊을 뿐 아니라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니 장차 성군이 되실 것이옵니다.”

태종은 마침내 양녕대군을 세자의 자리에서 쫓아내기로 결심했다.

 

 

조선을 개국한 지 불과 25, 태종은 자신이 이룩해놓은 강력한 왕권이 후대에 이르러 흐트러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즉위 16(1418) 태종은 하는 수 없이 적손 양녕대군의 장남 순성군으로 하여금 후사를 잇게 하려 했다. 그러자 대신들이 앞다투어 태종에게 간하였다.

일찍이 전하께옵서는 세자에게 군자의 덕을 가르치실 때 너무 이른감이 없지 않았사옵니다. 그러하옵거늘 이제 나이 어린 손자로 국사를 이으려 하신다면 앞날의 현명함을 능히 보장할 수 없사옵니다. 하물며 그 아버지를 폐하고 그 아들을 세우는 일이 어찌 도리에 합당하다 하오리까. 그런즉 현능한 분을 골라서 국사로 세움만 같지 못하나이다.”

결국 대신들의 간언으로 양녕의 아우인 충녕대군이 왕세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때가 태종 18(1414) 6, 양녕의 나이 24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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